새벽 6시도 채 안되어 눈이 번쩍 떠졌다. 여행을 왔다고 몸이 알아서 반응하는 것이다. 잠자리가 편해서 숙면을 취한 덕에 몸은 한결 가볍고 개운한 것 같다. 파자마에서 릴렉스 복으로 다시 갈아입고 외투를 걸치고 생수 한병를 들고 산책을 나섰다. 벌써 세번째 산책이고 같은 코스이지만 시간대가 다르니 보이는 것도 다른것 같다. 비가 왔는지, 물을 뿌렸는지, 그냥 새벽 이슬이 내린건지 주변이 온통 촉촉한 느낌이었다. 손님 수보다 많아보이는 직원들은 벌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우리처럼 부지런을 떨어 산책에 나선 다른 손님들도 볼 수 있었다. 가벼운 산책을 끝내고 라이브러리에서 커피를 한잔 뽑아서 연못가의 테이블에 앉았다. 야외에서 커피를 마셔도 된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산책에서 마주친 한 외국인이 그렇게 하길래 따라해 보았다.
우리가 다시 객실로 돌아갔을 때 쯤 언니네 부부가 아침 산책을 나섰고, 씻고, 거의 풀지도 않은 짐을 다시 싸고, 창가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니 아침을 차려주러 왔다. 일본으로 여행을 간 우리는 일식으로, 일본에서 사는 언니부부는 양식으로 아침을 주문했더니 식사준비를 위한 살림살이가 한 짐이었다. 한쪽 테이블에 차려진 일본식 조식은 유바를 이용한 나베요리와 구운생선이 메인이었는데 이를 위한 커다란 냄비와 핫플레이트(한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핫플레이트는 전혀 'hot'하지 않은데 냄비만 뜨거워졌다. 믿을수 없어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냄비가 올려진 부분을 만져보았지만 약간 따뜻한 정도)가 올려져 있었다. 또 다른 상에는 아메리칸스타일 조식을 위해서 5가지 종류의 잼과 요거트, 샐러드, 계란요리와 소세지, 그리고 프렌치프레스와 모래시계까지 꼼꼼하게 셋팅되어 있었고, 방 한 구석에는 빵을 구울수 있는 토스터까지 놓여있었다. 참으로 흠잡을 데 없는 룸 서비스였다. 양 작은 언니 덕분에 우리부부는 일식 1인분과 양식 쩜5 인분을 푸짐하게 먹었다지.
아쉽게도 체크아웃을 해야할 때가 되었다. 일단 아라시야마를 좀 구경한 다음 교토역 근처의 오래된 장어요리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짐은 료칸에서 바로 교토역으로 보내 보관하는 서비스가 있다고 카메라와 삼각대만 남기고 모두 보내버렸다. 다시 배를 타고 처음 왔던 곳으로 나가는데 어제와 달리 날씨가 참 좋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있고, 바람은 선선하고, 햇빛은 쨍하고, 물빛은 맑고, 숲은 푸르다. 참 좋구나. 언제가 단풍이 들었을 때 아니면 벚꽃이 피었을 때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더불어 가루이자와에 있다는 호시노야에도 한번...가보고...싶다.
호시노야 안에는 레스토랑이 하나 뿐이라, 아라시야마 지역에 있는 몇군데의 레스토랑을 추천하여 예약을 도와주거나 픽업서비스를 해주고 있었다. 그 중에는 미슐랭 3 star에 빛나는 레스토랑도 있고 좀 저렴한 차이니즈 레스토랑도 있고 뭐 그렇다. 미슐랭 3 star에서 잠시 흔들렸으나 아직은 한끼 식사비로 그 정도의 돈을 지불할 만한 능력도 베짱도 없는지라 호시노야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호시노야의 디너도 충분히 훌륭하였므로 아쉬움 따윈 전혀 남지 않았다.
4명이서 회색빛 릴렉스복을 맞춰입고 가죽으로 된 일본식 슬리퍼를 신고 많이 춥지는 않았지만 외투까지 걸쳐입고 예약시간에 맞춰 레스토랑으로 갔다. 1층은 Bar 형식으로 꾸며져 있고 2층은 몇 개의 room이 있는데, Bar에서는 요리사가 직접 메밀면을 반죽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글을 봤었다. 하지만 4명이서 Bar에 일렬로 앉아 식사를 하는 건 무리. 우린 2층으로 안내되었다. 별로 볼 생각도 없었지만 영어 메뉴는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세 종류의 코스요리와 여러가지 단품 요리들이 있었는데, 우린 미리 정해둔(일본에 오기 전에 언니가 호시노야 일본어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디너 코스 메뉴를 한글로 번역해서 보내주었기 때문에 이미 메뉴에 대한 결정은 끝나 있었던 상태였다) 코스를 주문하고, 곁들일 술도 취향대로 주문했다. 삐루삐루 노래를 하던 남편은 suntory premium malts 를 주문하고 나는 유자맛이 술맛보다 더 많이 나는 술을 주문하고, 언니와 형부는 시원한 사케를 주문했다.
건배와 함께 식사는 시작되었고, '맛있다. 맛있어' '오이시' '혼또 오이시' 등을 연발하며 우리의 짧은 일본어와 형부의 짧은 한국어가 어우러지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에 맥주를 몇 병 더 시킨듯 했고, 더운 사케를 한병 더 시켰고, 몇 개의 단품요리도 더 주문했다.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 펑퍼짐한 디자인의 릴렉스 복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한참을 먹고 마시고 웃고 난 후 불 켜진 료칸을 한바퀴 더 산책하고 객실로 돌아왔더니 낮에 차를 마셨던 다다미 방에, (자기들도 처음 와보면서 멀리서 온 우리를 게스트 대접 해주느라 근사한 침실을 선뜻 양보해 준 고마운) 언니네 부부를 위한 얌전한 이부자리가 가지런히 깔려있었다. 객실엔 tv는 없지만 아이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는 오디오가 있었고, 시나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종이와 편지봉투, 먹, 붓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나즈막하게 음악을 틀어놓고 다들 때 아닌 붓글씨 삼매경. 자기 이름 석자를 한글로 써보고 한자으로 써보는 게 전부였지만, 그나마 붓글씨를 배워본 적이 없는 나는 이름 석자도 제대로 써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던 기억이었다.